찹쌀떡 장수
추억이 다가오면서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분다.
이맘때면 어렸을적 찹쌀떡 장수가 생각난다.
......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전까지
우리집은 네 식구가 수원 시내의
아주 작은 아파트에 살았었다.
달랑 세 개의 동 밖에 없고,
한 동은 5층까지인 아주 작은 아파트였는데
당연히 엘리베이터 같은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6.25 피난민 집안 출신으로
장손이자 실질적 가장으로서,
어렸을적부터 부모님 뿐만 아니라
세 동생들을 보살피셨다.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신 후
약사가 되어 수원까지 내려와 개업을 하셨는데,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운명의 여인'을 만나
수원에 아주 정착을 하게 되신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자주 듣는
"우린 월세 단칸방 부터 시작했다"란
스토리와 같이,
우리 부모님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셨지만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
시내에 작은 아파트까지 장만하실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그 작지만 아늑했던 아파트에서의 아련한 추억이
내 기억 곳곳에 오롯이 새겨져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저녁 날이였는데,
초등학생인 나와 유치원생인 동생은
집에서 소파에서 TV를 보며 누워있었다.
그때 고요한 밖을
우렁찬 목소리가 깨웠는데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였다.
"찹쌀~떠억~~ 메밀~무욱~~~"
하던 찹쌀떡 장수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별안간 나는 무슨 생각이였는지
창문 밖에 대고 큰 소리로
"찹쌀떡 장수!" 하고 외쳤다.
아무리 다시금 기억을 해봐도
진짜로 찹쌀떡을 먹고 싶었던 것 같진 않다.
아마 어린아이의 장난이 아니였나 싶다.
그런데 이윽고 아주 힘차고
우렁찬 목소리가 화답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에~~!!!"
마치 '이리 오너라' 하는 대감댁 진사의
포효만큼이나 힘찬 목소리였는데,
거기에는 기쁨과 기대도 느껴졌다.
(기억하자. 당시엔 다들 대체로 빈곤과
결핍을 느끼던 시대였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고,
내 동생은 그런 나를 보며
"어떡해..." 하며 책망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 말도 못했고,
다행히 찹쌀떡 장수는 잠시 후 다시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지나갔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내 저금통을 털어서라도
그 찹쌀떡 장수에게 찹쌀떡을 사리라.
추운 날씨에 곱아 있을
그의 손에
나의 작은 손으로 쌈지돈을 쥐어주고
잠시나마
그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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