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는데 밤 사이 비가 내렸는지
차가 비에 젖어 있었다.
알고보니,
오늘은 절기상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라 했다.
춥고 쌀쌀해진 날씨에
비까지 내린 덕분인지
문득 아주 오래전
이맘때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때였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수원에 있는 작은 산 아래
붙어 있는 정말 조그만 시골학교였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교문밖을 빠져나와 저마다
학교앞 구멍가게에서 간식을 사먹거나
뽑기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삼삼오오 모여 놀이터로 놀러갔다.
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떨때는 학교가 끝나면,
학교 뒷산을 끙끙거리며 올라
산꼭대기에 있는 도서관에 가곤했다.
약간 찬바람이 불기시작한 가을,
아마도 10월 이맘때였던것 같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학원을 가기전 시간이 얼마남아
학교 뒷산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
어렸을때부터 나는 도서관이 좋았다.
사람들이 드문 드문 앉아있는
나무로 된 책상의 감촉이 좋았고,
책장을 가득 채운 오래된 책들에게서
풍기는 종이 냄새가 좋았고,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거리고 좋아하는 글이나
사진들을 보며 혼자서
끝없이 공상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날도 그렇게 여느때와 같이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아마도 리더스 다이제스트 였던것 같다)
이런 저런 공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번쩍 하더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삽시간에 먹구름이 끼더니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난감했다.
우산도 없었고, 집이나 학원까지 가려면
어린이 걸음으로는 한참을
걸어가야했던 터였다.
결국 읽던 책을 책장에 꽂아놓고
도서관 정문 앞까지 나와
밖에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언제나 비가 좀 잦아드려나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전혀 그칠줄을 몰랐고,
학원을 갈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결국 난 도서관을 나와
책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빗속을 뛰기 시작했다.
열심히 뛰면 금새 학원에 도착할거란
나의 기대는 헛되였음을 알게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서관을 나선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온몸과 책가방이 흠뻑 비에 젖었고
신발은 이내 물이 가득차 철퍽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학원 가는것을 포기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
어느순간 더 뛰기도 힘들어서
모든것을 체념한채 빗속을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물에 젖은 채로 걷는데
안경에 비와 습기가 가득차
앞이 보이지 않게되자
안경마저 벗어 책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갑자기 알 수 없는
평안함이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청난 가을비가 내리는 길을
나는 홀로 걸으며
오로지 빗방울이 땅위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리는
길을 걸으며
너무도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주 농후한 기억으로 각인되어졌다.
......
하루종일 직장에서 사람들과
일에 치이다 집으로 돌아온 오늘,
문득 비 오는 조용한 길을
혼자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가을비 내리는 길을
다시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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